칠량 벽송 인물

강진군 동백골 한옥마을 벽송출신(벽송길20) 송리처사 윤호철(尹好詧1612-1685) 매봉 윤갑현시인 생가터

상봉鷞峰 윤갑현 2016. 3. 13. 10:42
 


 
 
  
 

1. 머리글

칠량면은 1172년부터 지금까지 불러오며 문화유적으로는 고인돌이 강진군내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청자, 불용산의 수청사, 옹기, 상업항 봉황과 야철지의 부동이 인근 면과의 다른 점이다.

그래서인지 지명유래에 오곡과 면화 그리고 점토가 많아서라 했고, 다산은 칠양(七羊)이라적고 묘비에는 「옻나무골(漆鄕)」이라고도 적혔는데 그 유래는 현재의 비저산부터 연곡까지가 옻칠 생산지이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다루고져 하는 것은 금포 차유홍(錦圃車由弘1844-1930)이 남긴 우음본면각리시(偶吟本面各里詩)즉, 본면 각리에 대해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시가로 읊다」 라는 시 1편을 주제로 하여 그의 시세계와 번역문 순으로 다루어 칠량하면 옹기만 상징하는 선입견을 고치는데 일조가 되도록 해보기로 함이다.

2. 그 마을시의 고찰.

1) 차유홍의 시세계

전해오는 마을시를 살펴 보면은 거의가 한 마을에만 해당된 승경들을 엮었는데 작자인 차유홍은 칠량면 전체 마을을 대상으로 삼은점이 다르기 때문에 고찰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는 읍내의 동성에서 살다가 칠량으로 옮겨 살면서 평생을 인재 양성하는 설경(舌耕)으로 살면서 여러 글 친구와 사귄 것 같다. 그가 남겨놓은 문집은 모두 5책인데 첫째 1책은 없고 나머지 4책이 전한다. 4책 모두가 시를 모아 엮었는데 전체의 편수나 내용 등에 관한 분류는 연구가 되질 않았으며 그중에서 중요하겠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선별해 보니 2책은 25편, 3책은 6편, 4책은 29편, 5책은 14편으로 총 74편이었다.

이 내용을 다시 읍면별로 나누어 보면 우선 칠량면은 서당에 관한시로 현천의 청계제, 노현의 봉의제, 연주동의 태은제, 농암의 관풍제, 신흥의 여택제, 연곡의 애련제, 영동의 영벽제와 금릉제, 장포의 장천제, 율변의 제각제, 영풍의 영월제(永月). 송촌의 영월제가 있고 마을에 관한 시로는 옹점, 연주, 동백정, 덕동이 있다.

기타로는  죽도가 있고 사랑방으로는 부동의 최도정, 월송의 최우문, 장포의 김사규, 그리고 김윤좌의 사랑이다. 다음으로 본인과 관계된 계모임은 풍월계(風月), 화수계(和修), 만호계(晩好), 황종계회(黃鍾), 신종계(愼終)가 있고 시대에 관한 시로는 호렵(虎獵) 추석각전(秋夕脚戰) 관등(觀登)이 있다.

다음 읍면별로 적으면 강진읍은 읍성, 평동, 학명제, 동성, 객관, 초지의 문서제, 북산, 서성김경대 사랑, 신천서제, 서성서제, 서성사랑, 동성서제, 고성암이고, 군동은 호동, 신평, 백금포, 동골청년시회, 금곡시회이고, 대구는 정수사, 조계암, 송대, 석수동 윤공현사랑, 계치서제, 구석, 용문 안영숙 사랑이고, 마량은 마도의 소릉제, 마량시주(詩酒), 수인동이고 도암은 가우도, 소석문, 만덕사, 보암용산제, 파지대, 용산 김찬중 사랑, 윤방산 풍월책이고, 신전은 백도의 당산이고, 작천은 신리의 내기, 죽산 정보현의 낙금제이고 병영은 도룡의 무극정시이다.

2) 칠량면 각 마을을 우연히 읊어 본 시

남쪽 칠량면(七良面) 구로(舊路) 동쪽은, 운산(雲山)이 고견(顧見)하니 현천(玄川)이 통한다. 응암(鷹岩)이 높이 솟으니 반계(磻溪)에 달이뜨고, 학동(鶴洞)이 스스로 오니 장포(長浦)에 바람분다. 의식(衣食)이 영풍(永豊)하니 만복(萬福)이 많아지고, 안한(安閒)이 신흥(新興)하니 삼현(三賢)을 만났다. 옹점(甕店)은 옛날의 보련(寶鍊)땅인데, 도강(道康)은 영평(永平)에 맞춤만 못하리라」이다.

3. 맺는말


학문은 자기 수양을 위하여 시작하지만 많이 쌓여지면 남을 가르치는 일도 맡게 되 지역과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는 더 할 바 없는 즐거운 이로 쳐주었다. 그러나 그 일이 만만한 것은 절대로 아닌 탓에 「그의 ○은 개도 안먹는다」는 속담도 있는 반면에 훌륭한 스승으로 귀감이 되는 스승도 많이 있음은 글 보담은 큰마음을 가르쳐서이다.

칠량면의 학문에 대한 연구나 전거가 없어서 단언은 못하겠지만 단편적으로라도 알아보자면은 최초로 염걸(1545-1597)이 김광준(金光俊)에게서 배웠다. 그 뒤인 16세기는 송리처사 윤호철(松里處士 尹好詧1612-1685)과 매산처사 최재고(梅山處士 崔載高 1692-1755)가 교육을 맡았고, 18세기에는 금포 차유홍(1844-1930), 송은당 김동현(松隱堂 金東玹 1846-1918), 회봉 김현수(晦峯 金炫洙1848-1914), 경회 김영근(景晦 金永根 1865-1902), 송계 김상준(松溪 金相準 1869-1929), 계은 김상목(溪隱 金相穆 1884-1902)등이며 19세기에는 칠오당 김백진(七吾堂 金百鎭 1905-1950)으로 이어져 온 것 같다.

이 글을 정리한 이유는 첫째 시 한편에다 칠량면내에 소재한 15개 마을을 연상시키게 해 주었고 둘째는 산, 강, 달, 바람, 어진이와 생산품을 제시하고 또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즉 「살아서 칠량(生居七良)의 뜻을 담아 두었고 셋째 총74편의 강진 관련시를 엮어두어 18세기의 정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고 넷째 이중에서 마을 학교인 서당에 관한 시가 26편이나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권성치는 혼자 힘으로 칠량초등학교를 세워주도록 담판을 지었다 한다.

우선은 칠량면의 국도변에다 「각 마을시 비」를 하루빨리 세우고 다음으로 시 문학에 대한 학술강연회도 개최하여 그 내용을 온 나라에 알리며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체험장으로 활용하여야겠다.

 

강진의 연표


1290. 무외정오가 용혈암의 서쪽 괘탑암(掛塔菴)에서 살기 시작하여 1302년까지 13년간을 주석하다가 성전의 백운암(白雲菴)으로 옮겨 살았고 묘련사(妙蓮寺)로 옮겨간 뒤에도 전당(展堂)과 목조아미타상(木造아彌陀像)을 보수하다. 괘탑암은 정오의 조부가 창건했다 한다.
1294. 원나라에 영토(탐라)반환을 요청하여 제주(濟州)로 고치다.
괘탑암을 고치다. 월출산을 보월산(寶月山)이라 하다.
11월. 천책(天?) 국사가 선문보장록을 저술하고 1661년 지리산 능인암에서 성림이 간행하여 쌍계사에 보관하다.
1295. 정오가 능허대(凌虛臺)를 짓다. 나재신(羅宰臣)이 백련사에 매년 쌀 50석씩 바치고 3만승제(三萬僧濟)를 바라다고 하다.
1297. 정오가 초은정(招隱亭)을 짓다.


南道 정자기행(719)- '선비가 그립다' 강진 칠오당
겨울의 마수가 갑자기 다가오나 보다. 바닷가 바람이 유독 거칠어지게 차게 불어 온다.가을 수확물을 말리고 있는 농부들의 머리에는 흰머리가 유난히 바람에 날린다.산, 강, 달, 바람, 어진이와 옹기 등 특산품에 오래도록 평안한 곳  그래서 '살아서 칠량(生居七良)'이라는 전남 강진군 칠량면.

그림자를 길게 만드는  오후 영풍리에 있는 칠오당을 찾는다. 마을에 들어서니  칠량면 일대 학문을 주도했던 처사 송은당(松隱堂)  김동현(金東玹 1846-1918)의  송은당 처사 김공 행적비도 마을 수각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낮은 능선의 위치하고 있었으며 돌담이 붉은색의 돌을 사용한 것이 어느 시골보다 독특했다.

칠오당을 마을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곳을 모른다. 오늘도 혼자만 이리저리 헤맨다. 다행히 이 마을은 개가 한마리도 없었다. 그동안 수백곳을 찾아 다녔던 경험으로 언듯보이는 곳을 찾아 마당에 이르니 칠오당(七吾堂)이라는 현판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칠오당  김백진(七吾堂 金百鎭 1905-1950)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며 강학터, 즉 서당같은 역활을 했던 곳으로  마을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송은당처사 비문은 송은당유고(松隱堂遺稿 1941년)를 참조해 지었으며 그는 금릉팔경을 지은 김영근 선생의 문하생이였으며 평소 재주가 뛰어나 일대에서 정신적 지주의 역활을 했던 처사였다.19세기 칠량의 대표적인 학문가인 칠오당 주인 김백진(金百鎭)의 아들 김영희씨가 지였다고 한다.

청주 김씨인 김동현은 1846년 태어나 1919년까지 학문을 터득하며 후학을 가르치며 생을 살았다. 김공은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슬하에서 생활하면서 재주가 뛰어나 희대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로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였던 장성출신의 조선 6대 성리학자 중의 한사람인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 선생에서 글공부를 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노사 기정진의 손자로 동학군의 대장인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는 기우만과 친분을 쌓게 된다. 또 고종 임금의 스승으로 송시열의 9대손인 송병선이 김동현의 학생과 행실을 보면서 강진땅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인정받았던 숨은 인물이다. 
 

 
정내에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호를 극암(克菴)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였던  최재학(崔在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국포(菊圃), 칠오당(七吾堂라는 현판과 김영근(金永根)이 지은 운호정사(운호정사)찬과 국포당기(菊圃堂記), 김백진(金百鎭)의 칠오당기(七吾堂記)와 같이 걸려 있다.

당은 흙담으로 벽체가 이루어졌으며 쪽마루에 내실을 두고 팔작지붕으로 개량했지만 고풍이 남아 있다. 칠오당은 현재의 주위에 과거와 미래의 이중적인 감성을 투사하는 자연의 장소가 된다는 정자의 매력이 이곳에도 고스라니 남아 있었다. 

강진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는 다산 정약용, 그가 자식에게 보내낸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오게 한다.

"...........문장은 반드시 먼저 경학(經學)으로써 근기(根基)를 확고히 세운 뒤에 사서(史書)를 섭렵해서 정치의 득실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알아야 하며, 또 모름지기 실용적인 학문에 마음을 써서 옛사람들의 경제(經濟)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고서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둔 뒤에야 비로소 독서하는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 혹 안개 낀 아침과 달 밝은 밤, 짙은 녹음과 가랑비 내리는 것을 보면, 시상이 떠오르고 구상이 일어나서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동하는 시가(詩家)인 것이다........."

칠량면에는 남도 끝 오지임에도 어진이의 고을답게  선비들이 즐비하다. 염걸(1545-1597)을 비롯, 송리처사(松里處士) 윤호철(尹好詧1612-1685)과 매산처사(梅山處士) 최재고(崔載高 1692-1755) ,금포 차유홍(1844-1930), 송은당(松隱堂) 김동현(金東玹 1846-1918), 회봉(晦峯) 김현수( 金炫洙1848-1914),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1865-1934), 송계(松溪) 김상준(金相準 1869-1929), 계은(溪隱) 김상목(金相穆 1884-1902)에 칠오당(七吾堂) 김백진(金百鎭 1905-1950)으로 이어진다.

일대는 일상을 벗어 던지고 잠시만 묻히고 싶은 곳,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냈던 바로 유방선(柳方善 1388 우왕 14∼1443 세종 25)이  은둔생활을 하던 그런 상상이 연상되기도 한다.

첩첩 산중 솔나무, 참나무 사이 한 초가 / 담 등지고 해바라기, 졸음 솔솔 오누나.
옷 꿰맨 데선 노 왕맹처럼 이를 잡고 / 낚싯대론 부질없이 강태공처럼 고기 낚기
四山松櫟一茅廬 坐負墻暄睡味餘 衣縫每捫王猛蝨 漁竿空釣呂望魚

높은 벼슬은 하마 얻을 마음 없으니 / 금과 옥을 욕심 부려 저축해서 무엇하리.
토란이랑 밤이랑 날 보내기 넉넉하니 / 반찬에 하필 게장을 먹어 무삼하리.
軒裳已是無心得 金玉何須滿意儲 芋栗自堪謀送日 盤飱不必蟹爲胥

어촌같은 농촌, 바닷가에서는 조선후기 강진 도암면 만덕리 출신으로 성균관 전적통정대부, 병조참지 등을 역임했던 죽록(竹麓) 윤효관(尹孝寬1745-1823)의 어정(漁艇  고기잡이에 쓰이는 작은 배)이라는 시가 이곳의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낚싯대 하나에 반우장 걸친 채  /작은 배 몰고서 가볍게 새벽을 가른다 
아침에 서암에서 달빛 가득 실었으니  / 밤중의 풍파인들 무슨 상관 있으랴
一竿竹與半肩衰 小艇輕輕曉色打  早泊西巖閒載月 不關中夜惡風波

칠량면을 다산 정약용은 묘비에 칠양(七羊)을  옻나무골(漆鄕)이라고 적고 있다. 그 유래는 현재의 비저산부터 연곡까지가 옻칠 생산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면은 단월리 동백리 명주리 봉황리 삼흥리 송로리 송정리 영동리 영복리 장계리 현평리 흥학리 자연마을로 구성 강진만에 접한 서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군동면과의 사이에 금사봉이 있다. 반계천(磻溪川) 등 여러 하천이 서부와 중앙부에 넓은 평야가 자리하고 있다.

남쪽 칠량면(七良面)을 두고 읊은 시가 전해 온다. "응암(鷹岩)이 높이 솟으니 반계(磻溪)에 달이뜨고, 학동(鶴洞)이 스스로 오니 장포(長浦)에 바람분다. 의식(衣食)이 영풍(永豊)하니 만복(萬福)이 많아지고, 안한(安閒)이 신흥(新興)하니 삼현(三賢)을 만났다. 옹점(甕店)은 옛날의 보련(寶鍊)땅인데, 도강(道康)은 영평(永平)에 맞춤만 못하리라" 전하고 있으며 칠량면내에는 단월리 동백리 명주리 봉황리 삼흥리 송로리 송정리 영동리 영복리 장계리 현평리 흥학리 등 1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칠량에는 강진송전리지석묘군(전라남도기념물 제66호), 단월리의 강진염걸장군묘소(康津廉傑將軍墓所, 전라남도 기념물 제36호), 명주리와 봉황리 조선시대 도요지 등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자료참조=한국고전종합DB
문화.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