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허허,허한지고/박정호시조시인

상봉鷞峰 윤갑현 2020. 3. 30. 20:10

 

  

허허, 흉한지고 /박정호

-애고, 단풍

   

어느 녘 결구結句인가

소지 올리듯 붉어진 뜻은

무엇 있거든,

내장산에 흉 지어 감춰진 무엇

천지에 고하지 않아도

절로절로 드러나는.

    

 

세월의 숲인 것을,

내쳐 디뎌 왔는 것을

 

드난살이였던 거라 마상이 타고 왔던 거라 절며 가고 끌며 가서 등걸잠 자듯 잊혀지는 아무도 모르는 무게였던 거라 그러니 달궈져 던져진 돌이라 한들 어떻겠느냐 불붙어 날뛰는 어름산이라 한들 어떻겠느냐 그만하게 무겁고 그만하게 가볍게 사등롱 밝혀 들고 기우뚱거리는 잡놈의 어개춤사위를 따라 능선을 타 넘어 간다 애고 애고 잘도 간다 그 꼴 그 모양인 종생의 도린곁이라도 놓아 둔 마음 곁에 놓아 둔 손 하나 이윽고 그립더니라 몹쓸 놈 허튼 몸짓으로 움찔움찔 흔들리더니라 여 보아라 여 봐라

 

낯꽃이 허, 흉한지고

이냥 그대로 흉한지고.

-2019 가람시학 제1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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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어려우면서도 그냥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고 무슨 깊은 뜻이 살짝 숨어있는 매력과 호기심이 동하는 그런 시조다 시종일관 독자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구미가 확 당긴다. 종일 읽고읽고 또 읽다가 타는 해가 다 소진되었다.

제목부터 허허, 흉한지고감탄사로 시작되고 있는 이 작품은 단풍 물 곱게 든 내장산이 시적 배경이다.

흉하다 했다. 진한 녹음으로 차양을 만들어주며 근육질로 살지던 내장산 나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가던 길을 일탈해서 붉게 물들어 각혈을 하는 역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허허! 백신도 없는 전염병으로 온 동네를 불싸지르며 불길이 번지고 있다 그것도 점잔하지 못하게 붉은 색이다. 무슨 곡절이 있다. 어느 녘 갈무리 되는 마지막 結句던가 타 오르는 계절 앞에서 지성으로 소지 올리는 불꽃으로 무속 신앙까지 상상되고 있다 구태여 천지에 고하지 않아도 물들어 가는 단풍으로 소문은 다 드러나는 것을.

앞에 올라있는 단수 한 편의 도입부분은 작품 전체를 조율하고 있는 서곡쯤으로 이해하고 싶다. 여유롭고 멋스럽다.

작품은 이내 사설로 넘어 간다 한 수 놓고 보니 솟구치는 흥을 보듬어 다스릴 수가 없다 좋은 시는 흥에서 나온다. 춤사위다. 제멋에 겨워서 흥! 점잖은 선비의 내면세계는 지금 한참 휘몰이 장단이다. 능수야 버들이 흥 춤추고 있다. 예술의 첫 단계는 춤이 가장 빠른 표현이다. 타오르는 가을나무 앞에서 사설로 넘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필시 저것은 드난살이 가난뱅이가 살아 온 역정이면서 터득한 달관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때문에

세월의 숲인 것을,

내쳐 디뎌 왔는 것을

단내 나는 고난 속에서 달구어진 돌 하나 던지는 것이면 어떻고 불붙어 날뛰는 추운 겨울 어름산이면 어떻겠느냐고 붉은 단풍으로 궤적을 수정하면서 일탈하게 된 까닭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일갈하고 있다 풍경 하나를 바라 보는 시안詩眼이 넓고 깊다.

 

사등롱 밝혀 들고 기우뚱거리는 잡놈의 어개춤사위를 따라 능선을 타 넘어 간다 애고 애고 잘도 간다

어찌했든 인생은 진행형이다. 물 따라 맥 따라 활활 번지고 있는 내장산 단풍 모양을 이렇게 견주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몹쓸 놈 허튼 몸짓으로 움찔움찔 흔들리더니라 여 보아라 여 봐라

 

낯꽃이 허, 흉한지고

이냥 그대로 흉한지고.

 

하고 나머지는 독자 몫으로 돌리고 있다. 작품은 사설이지만 곳곳에서 생략과 응축이라는 본래 시조 형식을 잘 지켜 나가고 있다. 쓰잘데 없는 너스레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갈하는 흉한지고는 어쩌면 좋은지고! 일수도 있다. 작가의 눈에 들어오는 상관물을 반대로 뒤집어 볼 수 있는 능력 역시 깊은 사유 끝에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이다 바라보는 화자의 낯꽃이 이냥 그대로 흉한지고 라고 한 것만 봐도 그런 유추해석이 가능 해진다. 역시 넉넉한 선비정신으로 빚어진 글이다

에헴! 정읍 마을 높은 정자에 앉아 내장산 능선을 바라보는 선비가 보인다. 그러면서 작품 곳곳에서 종결어미 대신 읽는 이에게 진한 여운으로 남을 수 있는 말 줄임으로 처리되고 있다. 역시 시조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표현기법이다 더불어 읽는 재미로 토속적 언어가 즐비하다

드난살이 등걸잠 사등롱 종생 도린곁 낯꽃 등등이 그러하다

숨어있는 옛말을 잘 닦아서 적합한 곳에 어색하지 않게 앉혀 놓았다

낮이 설어도 어디서 들은 소리 같아 읽기에 불편하지 않다.

허허, 좋은지고! 이름도 낯설다 

박정호.

이렇게 좋은 글을 빚는 선비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지내 온 내가 못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