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협 시낭송 소식 및 사진 모음

공재 윤두서 고택에서(2009.10.24)

상봉鷞峰 윤갑현 2009. 10. 28. 10:19

공재 윤두서 고택의 오래된 향나무
양반가의 여인들이 부엌을 주변으로 텃밭을 일구며 살수 있게 되어있고 건축물 안쪽에는 연자방아와 곳간이 배치되어 있다.
동천교수님의 고택에 대한 설명에 문우들의 모습이 참으로 진지하다.

사대부가의 'ㄷ'자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공재 윤두서 선생 묘소에서 문우들과 함께

<문제완 사진작가/전남대학교 문예 창작과>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 고산(孤山)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으로 자는 효언(孝諺) 호는 공재(恭齋)이다. 그는 장남인 덕희와 손자인 용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는데, 시서화 음악 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 천문 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으며, 겸재 정선(謙齎 鄭敾) 현 재 심사정(玄齎 沈師正)과 함께 조선후기 삼재(三齋)로 꼽히는 화가이다. 공재는 학문에 정진하던 윤두서는 15세에 전주 이씨(李氏)와 결혼하였다. 남인계열이었던 그는 나이 25세에(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고 있어 남인(南人)계열의 해남 윤씨에게는 뜻을 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직의 뜻을 버리고 친구들과 학문에 열중하며 시서화 등 다양한 식견(識見)을 넓혔던 것이다. 그는 1712년 이후 만년까지 해남 연동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윤두서의 교우관계를 보면, 교우했던 이들 중 성호 이익(李益)의 둘째형 이서 심경득과 절친했는데, 그의 학문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공재가 조선후기 실학을 대성(大成)했던 성호 집안과 교우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공재가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던 실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성호 이익은 공재의 제문(祭文)에서 둘 형제가 윤두서로부터 박학(博學)한 면을 배웠고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아쉬움을 이야기 했다. 또 정약용도 강진 유배시절 외가인 윤두서의 집에서 책을 빌려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윤두서의 학문은 증조부 윤선도가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이러한 가풍에서 교육받았던 만큼 전통적인 성리학 체제가 남아 있어 후기 다른 실학자들과는 달리 당시의 모순과 폐단은 근원적인 성리학의 뜻을 구현함으로써 해결하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분적으로는 사대부계층에 속하면서도 특권중심세력에 벗어났던 환경적요인과 이익 집단과의 교류로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발판이 되었다. 공재는 조선전기의 관념성을 지향하던 문학예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정치 상황의 변화로 실사구시의 새로운 조짐이 싹트기 시작, 진경산수화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한 풍속화(風俗畵)가 그려지기 시작한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 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 그의 말 그림과 인물화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며, 해남에 있는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자화상 自畵像〉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 해남의 종가에는〈자화상〉외에도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보물 제 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가 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旋車圖〉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採艾圖〉등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런 화풍은 김홍도 등에 의하여 유행한 18세기 중·후반의 풍속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아들 덕희가 쓴 행장에도 나타나듯이 그의 실학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그가 남긴《동국여지도 東國與地圖》나 일본지도(日本地圖),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이서 등 이익 형제들과의 교분이 잘 말하여 준다. 또한. 그의 유품에는 중국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수용에 중요한 지침서인 고씨역대명화보 顧氏歷代名畵譜》도 끼어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 실제 종가 소장의 화첩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중국적이거나 전통성이 강하지만 18세기 중·후반 이후 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소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었으며, 조선 말기의 허련 도 해남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다. 그리고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나기지 않았지만, 풍부한 지식과 실학적 태도는 이익 형제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윤두서의 대표작품으로는〈자화상〉·〈채애도〉·〈선차도〉·〈백마도 白馬圖〉등이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 전하고 있으며 , 이 화첩은 산수(山水)·산수인물(山水人物)· 영모(翎毛)·화조(花鳥)·초충(草蟲)·도석인물(道釋人物)·화훼도(花卉圖)등 60여점 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노승도 老僧圖〉·〈심득경초상 深得經肖像〉 출렵도 出獵圖〉·〈우마도권 牛馬圖卷〉·〈심산지록도 深山芝鹿圖 〉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유고(遺稿) 기졸(記拙) 등의 내용을 보면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병법, 음악, 의학, 경제, 천문학, 기술 등 현실적인 측면까지 관심이 확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시문(詩文)에도 재능을 보여 농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슬픔, 가난하고 서글픈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읊고 있다. 또한 그는 '지극히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활에 전력할 수 있도록 조처해 줄 것'을 주장하는 등 사대부이면서도 가난한 서민과 불쌍한 노복을 보살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듯 그가 가졌던 다양한 관심과 분석이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통찰(洞擦)하게 하였고, 사회현실에 대한 개혁의지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 윤두서는 모든 인간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려, 그의 그림은 사실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 자신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描寫力)을 보여주는 공재의 자화상은 안면(顔面) 붓질이 많이 물리는 곳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시켜서 예리하게 직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없는 외모와 그의 도도한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最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색하는 선비가 자신의 모습을 떼어놓고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극한 인생을 성찰(省擦)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한다. 그 털끝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정기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을 초월하는 동양철학의 아름다움이 서려있다. 이 자화상이 얼굴 이외의 다른 신체는 모두 생략함으로써 자화상의 상징성을 극대화하였으며, 이러한 회화적(繪畵的) 단순성(單純性)으로 인해 보는 이의 시선이 공재의 안면에 집중되고 있는데 그의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이 맞부딪히면서 그림의 생명력이 전달된다. 또한 백마도(白馬圖 보물 제481호)는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정지된 상태에서 뒷다리는 살짝 들어올리는 조그만 변화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두 여인'은 자화상에 다음가는 작품으로 그 역시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본 기사는 비엠뉴스(Bmnews)의 2006년 02월 27일자 기사입니다. ( 뉴스테이지(Newstage)로 2007년 7월 23일 변경됨)
<음원:가을 나그네를 위한 플롯 연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