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량 벽송 인물

강진군 동백골 한옥마을 벽송출신(벽송길 10) [강진인물사6] 野人 합수 윤한봉 생가 (1947.12~ 2007. 6)

상봉鷞峰 윤갑현 2016. 3. 13. 10:35

숨가쁜 고난과 투쟁… 희생과 역경으로 점철된  삶 살아

70· 80년대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들 중에 윤한봉만큼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이름도 드물 것이다. 그는 늘 역사의 뒤쪽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재자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였고, 때론 동료들한테도 가장 껄끄러운 사람이였다. 독재자들에 쫒겨 민주화세력의 등에 떠밀려 그는 1981년 4월 29일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곳에서 해외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을 했다. 그는 수배가 풀려 귀국해서도 정권과 싸웠고, 5.18 세력과도 대립했다. 2007년 6월 폐기종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영원한 야인이였다.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윤한봉은 1947년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대학은 전남대 농과대학 축산과를 갔다.  그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선포에 반대하면서 본격적인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다음해인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거받고 전남대에서 제적됐다.

그의 숨가쁜 민주화운동 행렬은 계속된다.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1977년 만기출소했고 이후 함평고구마사건, 들불야학 사건, 전국농민쌀생산자대회 개최, 전남민주청년회의회 활동, 전남대방화사건 배후조종자 의심등 그는 전남에서 일어난 크고작은 민주화운동에 빼지 않고 몸을 실었다.

그러다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예견한다. 신군부가 절대 권력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도, 시민들의 큰 희생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그 운동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5.18 이전에 여러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이러한 이유등으로 신군부세력으로부터 일찌감치 5.18 핵심주동인물로 찍히면서 거액의 현상수배자가 됐다.

신군부는 그를 체포해 폭동의 수괴로 만들어 전남의 운동조직을 일망타진할 요량이였다. 그가 체포돼 신군부의 제물이되는 것은 본인에게도 억울하고 두려운 일이였지만 전남운동 세력도 치명적인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1981년 4월까지 국내에서 지리한 도피생활을 하다 4월 29일 마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한다.    

 


 
오래전에 찍은 윤한봉선생의 칠량 본가 가족사진이다. 맨 앞줄 중간 한복입은 할머니가 모친 김병순 여사다.<사진=윤한봉 기념사업회>

野人 윤한봉(1947.12~ 2007. 6) - <1>
 “이대로 안된다…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전남대 재학시절 박정희정권 유신선포 접하며 야인의 길로

칠량면장 아들 4형제…모두 양심수 투옥경력
윤태선 국가보안법, 윤광장 전교조 해직교사,
셋째가 윤한봉, 윤영배 농민운동가 출신 도의원

강진읍에서 국도 23호선을 타고 마량으로 내려가다 보면 칠량 농공단지 좌측으로 진입로가 있다. 동백리로 들어가는 곳이다. 동백리는 벽송, 현천, 동백마을등 3개 마을이 한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윤한봉 선생은 이곳 벽송마을에서 1947년 12월 22일 아버지 윤옥현과 어머니 김병순의 4남2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버지는 75년 작고했고, 모친 김병순(98)씨는 현재 칠량면소재지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윤옥현씨는 칠량면장을 두 번 역임하고 청년단장과 소방대장등을 지낸 칠량의 대표적인 우익인사였다. 칠량면 홈페이지의 역대면장 내용을 보면 윤옥현씨는 1952년 5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7대 면장을 재냈고, 다시 1954년부터 58년 3월까지 9대, 10대 면장을 지냈다. 당시 면장들의 주소를 보면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 동안 동백리 사람들이 면장직을 휩쓸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952년 7대 윤옥현 면장에 이어 8대를 동백마을의 김기만 면장이 취임했고, 다시 윤옥현 면장이 9대와 10대를 한데이어 11대를 김기만 면장이 재임했고, 12대면장은 역시 벽송마을 윤삼현씨가 이름을 올렸다.<칠량면홈페이지 참조>

내용이 잠시 벗어났는데, 아무튼 윤한봉 선생은 대농은 아니지만 지역유지로 활동했던 부친의 슬하에서 비교적 넉넉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머슴이 많을 때는 여섯명이나 됐다고 한다. 윤한봉 선생의 아제뻘이면서 칠량초등학교 1년 후배인 벽송마을 윤명현(66)씨는 “한봉이가 공부도 잘했고 똑똑했다.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아서 늘 인기가 많았다.

오래살았다면 틀림없이 빛을 봤을 텐데 너무도 안타깝다. 자식도 없이 죽어서 너무 불쌍하다”고 회고했다. 그 말을 듣던 같은 마을 김재량 전 강진군유도회장도 “그 말이 맞다. 정말 아까운 사람이였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윤한봉 선생 4형제는 친정부, 친관료적인 삶을 살았던 부친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장남인 윤태선은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됐고, 둘째 윤광장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투옥됐다. 셋째가 윤한봉이고, 도의원을 지낸 넷째 윤영배는 농민운동으로 투옥되어 4형제가 양심수 전력을 가지고 있다.<윤난실 블로그 http://blog.naver.com/nanshil11 참조> 진보신당 부대표와 광주시당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난실씨가 장남 윤태선의 장녀다.

  
윤한봉선생의 고향마을인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모습이다.

윤광장은 1980년 광주 대동고 교사로 재직 중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돼 소요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해직됐다. 그는 또 1989년 전교조 파동 때도 해직되는 등 모두 3차례 교직을 떠났다가 복직해 2004년 광주자연과학고에서 정년퇴직한 뒤 1987년에는 ‘민주교육 광주전남교사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이후 1993년에는 5·18민중항쟁구속자동지회장 등을 지냈으며 2008년 4월에는 5.18 기념재단 이사장이 됐다.<중앙일보 2008일 4월 9일자 참조>

윤옥현은 1975년 2월 6일 5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셋째 아들 한봉씨가 74년 11월 중순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15년의 형이 확정된 후 극심한 홧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동아일보 75년 2월 11일자에는 구속아들의 석방을 기다리다 숨진 어느아버지의 사연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윤옥현씨의 사연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윤옥현은 74년 4월 8일 아들 윤한봉이 전남도경에 연행돼 구속됐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며칠만에 일어나더니 저녁만되면 집앞에 나가 들녘을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리곤 했다. 또 잠을 자다가도 “내자식 죄가 없는데 그랬다. 곧 석방된다는데 지금 집에 왔으냐”면서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갈 때도 많았다.

윤옥현은 결국 6일 오후 4시 숨을 거두었다. 설을 며칠 앞둔 날이였다. 그런 유언을 남겼다. “꽃피는 올 봄에 꼭 내 아이가 풀려나와 나의 무덤에 술잔을 올렸으면...” 윤옥현이 숨을 거둔 직후의 일이였다. 오후 6시쯤 아들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였다.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안 윤한봉의 편지였다. 편지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시고 집안에 별일 없습니까. 연로하신 아버님께옵서 공장으로 창고로 분주히 오가시는 것이 눈에 선해 가끔 철창밖에 두 눈을 두곤합니다. 어머님께서는 감기 몸살이나 안걸리셨는지요. 내 친구 광흠이가 장가간뒤 또 누가 결혼은 했는지요. 철진이는 아들을 낳았다지요...”

가족들은 윤한봉의 편지를 설날 아침 제사상에 놓고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망사실을 감옥의 윤한봉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친의 간절한 유언이 통했던 것일까. 윤한봉은 1975년 2월 16일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출소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10일 후의 일이였다. 윤한봉은 부친의 유언대로 그해 봄 꽃피던때 무덤에 술잔을 올렸다고 한다.

광주에서 조선대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윤한봉은 바로 광주일고에 진학했다. 그해 광주일고에 진학한 강진출신 동기들이 여럿 있었다. 윤한봉선생을 비롯해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했던 김재종, 차범규(강진읍), 송기평(군동), 김창옥(강진읍)씨등 5~6명이 그의 고향동기들이다. 이들은 훗날 계모임을 만들어 지속적인 모임을 갖곤했다. 김재종 전 치안비서관의 맡형인 김재량 전 유도회장이 당시 강진출신 광주일고 입학생들을 기억해 주었다.

윤한봉의 고등학교 생활은 그렇게 좋지가 못했다. 윤한봉은 2006년 한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고민이 많아 학교생활이 엉망이였다. 순전이 땡땡이 치고 인자...혼자 심난한 거지”라고 웃었다.

윤한봉은 일고를 졸업하면서 대학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재수를 하겠다고 절에서 1년을 보냈다. 아마도 당시가 윤한봉의 인생에서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 아니였을까 싶다. 윤한봉은 절에 살면서 ‘산에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물가에 앉아서 낮잠이나 자고’ 그랬다. 그후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군대에 자원입대해서 일찍 군대생활을 마쳤다.

그는 농촌에 들어가서 사는게 꿈이였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생각이였다. 영화에서 본 대로 초지를 가꿔서 양떼를 몰고 그 옆에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가을에는 싱싱한 사과를 따먹고 싶었다. 유달리 신석정 시인의 서정시를 좋아한 것도 윤한봉의 일상이였다. 그래서 진학한 곳이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이였다. 1971년 그의 나이 23세때의 일이다. 그중에서도 축산과를 선택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새내기 윤한봉에게 전혀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해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박정희는 1969년 9월 3선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후 다음해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국민들의 직접투표방식이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빅매치가 벌어졌다. 결과는 634만 2828표(득표율 53.2%)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539만 5900표(득표율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 이듬해 유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대학생들의 사상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그해 교련교육을 도입한다. 박정희 정권의 본격적인 학원탄압을 알리는 서막이였다. 전국적으로 교련반대시위와 학원 병영화반대시위가 일어났고, 전남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였다. 나름 대로 ‘예비역 티’를 내며 학업에 열중했던 윤한봉은 몇차례 교련반대시위에 참여했으나 전남대 인문대 뒤쪽에 하숙방을 정해놓고 도서관만을 열심히 오고간 모범적인 학생이였다. 일요일에도 도서관을 나갔다. 우선목표는 대학졸업하고 고향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였다.

그렇게 2학년이 됐다. 그런데 그해 큰 사건이 터졌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선포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휴교령을 내리고 위수령을 선포해 전남대에 군인들을 진입시켰다. 윤한봉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와, 그때 내가 뒤집어 졌지. 하숙방에 들어가 보고 있던 책에 볼펜으로 찍어불고 사전 또 찢어버리고, 벽에도 박치기 하고… 어떻게 화가나는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분노 때문에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와 그날 어떻게 화가 나는지 이렇게 무시당할 수 있고 이렇게 우롱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분통이 터져가지고…”<윤한봉 구술녹취문. 박현정. 5.18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연구 참조> 그러나 윤한봉이 정말 ‘싸우기로’ 결심한 것은 의외로 며칠 후 고향에 내려와 강진에서 겪게된 일 때문이였다.                       

유신헌법이란?

1972년 10월 17일의 10월유신체제에 따라 197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헌법이다. 한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된 제4공화국의 헌법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회적 통일’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1972년 10월 17일),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 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한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2.9%에 찬성 91.5%로 확정되고, 12월 27일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한편 유신헌법을 공포 함으로써 유신체제는 수립되었다. 이로써 장기집권은 시작된다.

처음 개정 시 유신헌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과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확립, 자유와 평화수호의 재확인’ 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강화로 독재의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다.<naver 지식백과 참조>






       

윤난실

윤난실

생년월일 : 1965~출생지: 전남 강진

1965년 전남 강진에서 아버지 윤태선과 어머니 오숙민의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광주항쟁 때 피신해 온 고등학생인 두 아들을 질책하며 도로 쫓아 보낼 정도로 아버님이 올곧으셨다. 윤난실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산 역사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아버지 윤태선을 비롯해 큰삼촌 윤광장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둘째삼촌 윤한봉은 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셋째삼촌 윤영배는 농민운동으로 투옥되었다. 1984년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 광주교대에 입학했으나, 총학생회 부회장에 출마해 군사교육 반대 투쟁에 앞장서다 무기정학을 받아 3학년 때 대학을 그만두었다. 1986년 학력을 속이고 방직공장과 메리야스공장에 들어가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야학과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에서 왕성하게 활동해 광주 지역 노동자들의 기본권 확보와 노동자 정치 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2002년 6월 최초의 진보 정당 광주광역시(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광주광역시 태양에너지 조례 제정, 시내버스 준공영제 도입,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지원 조례 제정 등을 주도해 ‘광주일란(光州一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6년에는 1년 6개월간 광주M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시선집중 광주]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 진보신당 부대표.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세상을 너무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

민청학련 사건 주도, 12년간 도피생활, 5·18마지막 수배자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사나이가 있다. 이름하여 합수 故윤한봉. 촌스럽고 털털했던 그의 별명은 합수였다. 전라도 말로 ‘똥과 오줌이 섞인 거름물’을 말한다.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시작된 일정

80년 당시 5.18민주화항쟁의 수배자로 인해 도피생활 끝에 눈감는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서 살다간 그는 ‘한 없이 자신을 낮추고 민중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으로 합수라 불리길 원했다.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여름 피서철이 다가오기 전인 지난 6월 22일, 국립5.18민주묘지에 웬일인지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가 열사 6주기를 맞아 유홍준 명지대 교수와 5.18민주묘지 추모 및 참배, 윤한봉 열사 고향 강진 남도답사를 준비했다.

이날 ‘미술사 유홍준 선생과 함께 하는 2013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합수 윤한봉의 고향, 청자의 고향 강진’ 1박 2일 프로그램은 서울, 경기 광주, 전주 등에서 120여 명이 참가했고, 5.18민주묘지에서 추모를 마친 뒤 강진답사 길은 설렘이 가득차 보였다.

이들은 추모행사를 가진 뒤 윤한봉 선생의 고향인 강진 ‘벽송마을’에 있는 생가를 찾았다. 그가 살았던 벽송마을은 푸른 소나무가 둘러쌓여 푸릇푸릇하게 우거진 녹음이 꽤나 상쾌했다.

 

 

 
▲합수 윤한봉 열사의 생가인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김미이, 정수미씨 (48.서울 강남구/ 서초구)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정수미·김미이씨(48·서울 서초구/강남구)는 “저희도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광주에서 살면서 5.18민주화항쟁을 겪었던 세대다”며 “윤한봉 열사의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게 됐는데 와서 생가를 둘러보니 너무나 푸근한 느낌이 들고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렇듯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윤한봉 선생은 1947년 12월 22일 전남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제11회 출신)를 졸업하고, 지난 1971년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황은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발포하고 반독재 정권으로 가슴속 뜨거운 민주화의 울분을 끌어올리게 했다. 이후 민주화를 위해 반독재투쟁결의 유인물 배포,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로 지명수배 받아 지난 1974년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 구형을 받게 됐다.

합수 윤한봉 선생 추억 깃든 장소 찾아

결국 전남대에서 제적을 받았지만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출소하게 됐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바로 다음해 1975년 인혁당 관련 인사 사형집행 독재 타도 결의를 주도하고, 76년 부활절 예배사건에 연루가 되어 또다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합수 윤한봉 열사의 모교인 칠량초등학교
  
 

참가자들은 대열을 따라 윤한봉 열사의 모교 칠량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강진에 있는 칠량초등학교는 드넓은 운동장에 시원한 나무그늘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 20돌을 맞이하는 유홍준 교수는 “윤한봉, 그가 했던 언로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그가 무엇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 자신을 추스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 위치한 정수사 입구
  
▲미술사 유홍준 명지대 교수
  
▲정수사

다음 코스는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 있는 정수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도 윤한봉 선생이 잠시 머물다 간 곳으로 녹음의 싱그러움과 상쾌한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답사 코스로는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강진청자박물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유홍준 교수의 강연이 듣기 전 미리 고려청자에 대해 눈으로 직접 살펴보고 설명을 들었다.

  
▲강진청자박물관
  
▲이명준씨(66.서울 옥수동)

박물관 관람 도중 만난 이명준(66·서울 옥수동)씨는 “윤한봉 그 사람은 내 친구였지. 수배시절에 도피하고 있을때는 자주 만났었어. 그 놈 장례식 이후에는 처음으로 강진이랑 광주에 오게 됐는데 감회가 정말 남달라”라며 “참 그놈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놈이었지. 우리 연배들을 만나면 항상 한봉이가 너무 그리워. 그 놈 한 성깔, 한 놈이었거든”라고 그리워했다.

그렇게 문화답사 일정을 끝내고 유홍준 교수는 강진아트홀에서 같은날 오후 5시부터 ‘천하제일 고려비색, 고려청자의 발생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힘든 도피 생활 끝에 역사 바로 잡기 나서

강연에서 유 교수는 “한국 예술품이 세계에 나갔을 때 청자만큼은 최고로 꼽히며, 우리 조상님들은 청자들을 소중히 여기셨다”며 “우리도 고려청자의 위대함, 섬세함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하고 청자는 오늘날 고려시대 문화를 빛나게 해준 것이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만난 윤한봉 열사의 아내 신경희(53·봉선동)씨는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선배님으로 만났지만 그는 나보다 어렵고 못사는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눈을 뜨게 해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생각한다”며 “남편은 나를 ‘소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하는 물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물이 흐르는 대로 살라는 것도 있지만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처럼 굳세게 사는 것도 있는 담겨져 있다. 이처럼 남편에게 배운 것은 너무 참다워 나에겐 스승님이기도 했다”고 글썽였다.

  
▲합수 윤한봉 선생의 부인인 신경희씨와 윤한봉 선생.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누리집

이렇게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해둘 합수 윤한봉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광주에는 없었다고 한다. 이미 70년대 독재정권 민청학년, 인혁당 사건 등으로 인해 몇 차례 구속전과가 있었으며 5.18민주화항쟁이 터지자마자 핵심주동인물로 지목되어 현상 수배됐기 때문이다.

합수 윤한봉이 잡히면 고문 정도가 아니라 죽을 목숨이었기 때문에 1년여 우여곡절 도피생활 끝에 결국 지난 1981년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살아남아 있는 것이 몸서리치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역사, 민주주의를 이루어 내기 위해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반미주의적 태도, 통일운동, 전두환·노태우 방미규탄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 합수는 망명 이후 12년 만에 귀국을 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94년에 5.18기념재단 창립 주도를 했고, 이 외에도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박관현 열사 장학재단 이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결성 등 다양한 활동 중 폐기종 건강악화로 향년 61세에 별세했다.

이후 2007년 합수는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를 받고, 국립 5.18묘지에 안장됐지만 죄인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결국 고인이 되고 나서 지난 2010년 서울 중앙지법 형사하의 22부는 민청학연 사건에 연루돼 긴급조치 위반 협의 등으로 실형이 확정된 故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의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예비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처럼 1박 2일의 여정을 이끌었던 유홍준 교수의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합수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김다이 기자